지난 3월 28일 경기도 부천시 DB하이텍 본사에서 열린 DB하이텍 제71기 정기주주총회에서 조기석 DB하이텍 대표이사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DB하이텍
지난 3월 28일 경기도 부천시 DB하이텍 본사에서 열린 DB하이텍 제71기 정기주주총회에서 조기석 DB하이텍 대표이사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DB하이텍

[주간한국 이재형 기자] 올해 주주총회(주총)에서는 자사주 소각을 비롯한 '주주환원' 정책도 화두가 됐다. 국내 증시의 저평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추진하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계기로 주가와 배당 등에 주주제안이 쏟아졌다. 밸류업은 상장 기업이 주주 가치를 높이기 위해 배당 확대 및 자사주 소각과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유도, 한국 증시를 강화하는 방침을 말한다. 그러나 올해 주주총회에서는 대다수 주주제안이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한 채 끝나 소위 개미들이 기대했던 ‘역전 드라마’는 볼 수 없었다.

‘자사주 소각’ 이슈된 DB하이텍·삼성물산·아난티

지난 28일 개최된 DB하이텍의 제71기 주총도 자사주 소각 등 주주환원 정책이 화두였다. 앞서 DB하이텍은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발행주식 중 자사주 비율을 15%까지 올리고, 주주 환원율을 30%로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지난해까지 자사주 비율을 6.14%로 올렸고, 점진적으로 15%까지 확대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최근 주가가 하락세인 점을 감안해 계획보다 자사주 비율 목표치를 1%포인트 더 올리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날 주총장에서는 이에 그치지 말고 매입한 자사주를 소각해 주식 가치를 올려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발행 주식 수가 줄어 일반 주주들이 보유한 주식의 가치가 올라간다. 이상목 DB하이텍 소액주주연대 대표는 “앞서 DB하이텍이 자사주 매입 당시 주주환원 목적이라고 공시해 놓고, 소각없이 보유하고 있는 것은 공시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DB하이텍 소액주주 연대는 주총에서 결의한 경우에 한해 이사회 결의 없이도 자기주식을 소각할 수 있도록 정관을 신설하는 안건을 냈으나 동의율이 16.1%에 그쳐 부결됐다. 의결하기로 했던 자사주 272만 6653주 소각 안건도 자동으로 폐기됐다.

DB하이텍은 지난해 소액주주 반대가 거셌던 팹리스 자회사 물적분할을 단행한 데 이어 최근 엔비디아와 SK하이닉스 중심의 반도체 랠리에 편승하지 못해 주가가 하락세를 타면서 주주가치 제고에 대한 요구가 거센 상황이었다.

DB하이텍 한 주주는 이날 “지난해 주총 때 시가총액이 3조원을 좀 넘었는데, 당시 주총 의장이었던 최창식 DB하이텍 부회장이 ‘조만간 시총을 6조원으로 만들겠다’고 큰소리쳤다”며 “현재 주가는 1조 9100억원 정도로 떨어졌다. 이런 사안에 대해 사과부터 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이에 주총 의장을 맡은 조기석 DB하이텍 대표는 “지금 저희들이 주주가치 제고 목적으로 자사주를 (매입)한 거는 소각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자사주 매입으로 유통 주식 수를 줄이면 주식 가치를 올리는 효과도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조 대표는 “자사주는 여러가지 활용성이 있다. 내부적으로 활용하는 방법도 있고, 외부인사를 모집할 때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며 “신사업 관련해서 전략적 제휴 등에 자사주를 사용할 수도 있는데, 이것을 그냥 소각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삼성물산은 지난 15일 주총에서 배당과 자사주 취득 안건을 놓고 영국계 행동주의펀드 시티오브런던과 한국의 안다자산운용 등 5개 행동주의펀드 연합과 삼성물산 이사회가 대립해 표 대결이 벌어지기도 했다.

행동주의 펀드가 제시한 배당안(보통주 4500원·우선주 4550원)은 의결권을 가진 총 주식수의 23% 지지를 얻어 동의율 77%를 확보한 삼성물산 이사회의 배당안(보통주 2550원·우선주 2600원)에 밀려 부결됐다. 행동주의 펀드가 제시한 자사주 취득 안건은 찬성 18%에 그쳐 부결됐다. 이날 삼성물산의 주가는 주총 결과에 영향을 받은 듯 장중 9%대 하락세를 기록했다.

지난 28일 개최된 호텔·리조트 기업 아난티의 제37기 정기 주총도 배당안을 놓고 회사와 주주가 대립했다. 아난티도 DB하이텍과 마찬가지로 주총에서 결의된 경우, 이사회 결의 없이 자사주를 소각할 수 있도록 정관을 변경하는 안건이 소액주주들 제안으로 상정됐으나 부결됐다. 이에 1640만주 규모 자기주식을 취득하고 이를 소각하라는 내용의 안건도 자동으로 폐기됐다. 대신 아난티는 자기주식 200만주를 취득하고 이를 소각하는 안건을 주총에 상정, 통과시켰다. 취득 예정금액은 129억원 규모이며, 아난티는 오는 6월 28일까지 자기주식 취득을 완료할 계획이다.

‘당근’으로 다스리는 K-밸류업, 주주정책 변화 가능할까?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앞줄 왼쪽 다섯 번째)이 지난 7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거래소 서울 사옥에서 열린 기업 밸류업 자문단 구성 및 킥오프 회의에 참석해 기업 밸류업 자문단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앞줄 왼쪽 다섯 번째)이 지난 7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거래소 서울 사옥에서 열린 기업 밸류업 자문단 구성 및 킥오프 회의에 참석해 기업 밸류업 자문단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국ESG기준원(KCGS)이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주주제안 건수는 지난해 195건으로 2022년(142건)에 비해 37% 증가했다. 올해는 밸류업 도입을 계기로 주주제안의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졌으나 소액주주가 제안한 안건이 가결된 경우는 거의 없다.

현재 밸류업에 참여하는 기업들은 앞으로 전체 유가증권시장·코스닥시장 상장사를 기준으로 현황 진단부터 목표 수립, 이행 평가까지 이르는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수립하고 연 1회 자율 공시하게 된다. 수익성, 성장성, 시장평가, 주주환원 등의 지표로 회사 상황을 분석한 뒤 주주환원과 지배구조 개선 방안을 포함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밸류개선 성과가 부진한 종목은 상장폐지까지 가능한 일본과 달리 국내 밸류업은 대체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의 ‘당근책’으로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우수기업에 표창을 수여하고, 모범 납세자 선정 우대 등 세정지원 혜택도 제공하는 식이다. 금융당국은 수익성이나 시장 평가가 양호한 기업들로 구성된 ‘코리아 밸류업 지수’를 만들어 기관·외국인 투자자들이 투자 때 참고하도록 오는 9월안에 제공할 방침이다. 해당 지수를 추종하는 상장지수펀드(ETF)도 오는 12월 출시 및 상장하기로 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28일 “기업 밸류업 지원 방안을 지속해서 발전시켜 기업들이 주주 친화적으로 경영하도록 유인하고 효율적인 자본시장 인프라 구축을 통해 투자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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