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엔화. 사진=연합뉴스
일본 엔화. 사진=연합뉴스

지난달 19일 일본은행은 기준금리를 -0.1%에서 0~0.1%로 인상했다. 2016년 1월 -0.1%로 인하한 이후 무려 8년 만의 일이다. 불과 0.2%포인트 인상이 가능한데도, 굳이 밴드로 설정해 조정의 여지를 남겨둔 것은 당국의 노심초사를 보여준다. 수익률곡선 제어(YCC) 정책도 폐지했다. 그동안 일본은행은 10년물 국채를 매입해 장기금리를 일정 수준 이내로 통제했다. 시장의 힘에 의해 장기금리가 올라갈 여지를 허용한 것이다. 물론 지나치게 오른다고 판단하면 당국은 언제든지 개입할 것이다.

일본은행의 상장지수펀드(ETF) 및 부동산투자신탁(REIT) 매입도 중단하기로 했다.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주가와 지가를 부양하는 황당한 상황이 종료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통화정책의 정상화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의 무리한 통화정책은 일본 경제가 얼마나 비틀려 있는가를 보여주는 징표였다.

일본은 왜 이렇게 무리수를 두게 되었는가? 그것은 1990년대 초의 버블 붕괴에 대한 대응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자산가격의 폭락은 그것을 보유한 가계·기업의 파탄뿐 아니라 대출을 제공한 은행의 경영난으로 이어졌다. 거대한 부실자산이 쌓였다. 일본정부는 공적자금을 투입해 금융기관을 지원하고 공공지출을 확대했다. 불황으로 세수는 줄어드는데 지출이 늘어나니 간극을 국채로 메웠고, 그 결과 국가부채가 빠르게 늘었다. 위기의식이 고조됐다.

1997년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가 개혁의 칼을 뽑아 들었다. 대장성의 권한을 축소해 시장 기능을 강화하고 부실에 찌든 주택 전문 금융회사를 구조조정했다. 파산 소문이 돌던 은행에서 예금인출 행렬이 장사진을 쳤다. 은행은 대출에 극히 소극적이 됐고, 이는 불황을 심화시켰다.

정부의 시도는 1997년 불어 닥친 아시아 외환 위기로 중단된다. 여파가 일본으로 밀려왔고 구조조정을 계속하기에는 경기가 너무 악화된 것이다. 1999년에는 금리가 제로까지 내려갔고, 2001년부터는 양적완화가 시작됐다. 오늘날 미국 통화정책의 대명사가 됐지만, 원조는 일본이었던 것이다.

배턴을 이어받은 것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다. 그는 부실채권 정리를 본격적으로 시행했고, 이 와중에 다수 은행과 기업이 도산하거나 합병됐다. 실업자가 급증하고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02년 0.1%까지 떨어졌다. 그는 작은 정부와 민영화를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개혁도 추진했다. 진입 규제 완화를 통해 경쟁을 활성화하고, 규제개혁 특구를 만들었다. 노동자파견법을 개정해 비정규직을 양산했다. 재정건전화를 명분으로 사회보험료를 인상했다.

개혁의 완성은 아베 신조 총리에 들어서 이뤄진다. 그는 대담한 통화정책, 기동적인 재정정책, 투자를 촉진하는 성장 전략을 세 개의 화살로 내세웠다. 아베노믹스가 시작된 것이다. 기준금리를 제로로 낮추고 양적·질적완화를 시행했다. 일본은행의 공격적인 국채매입에 더해 주식 및 부동산펀드를 매입했다. 안정성이 떨어지는 자산을 매입하기 때문에 질적 완화라고 불렀다. 민간의 부족한 유효수요를 보충하기 위해 정부가 재정지출을 확대했다.

그러나 급속한 고령화로 늘어나는 사회보장비를 감당하기에 급급했고, 경기부양에 활용할 수 있는 예산은 제한적이었다. 빚으로 빚을 갚는 고리가 만들어졌고, 국가부채는 감당하기 어렵게 커졌다. 투자를 활성화한다는 명분으로 법인세를 깎고 역진적인 소비세를 인상함으로써 사회의 구매력이 떨어졌다. 비정규직 급증과 더불어 민간 수요를 줄이는데 기여했다.

이에 민간투자를 늘리기 위해 규제 완화를 지속했고, 테스트베드로 국가전략 특구를 만들었다. 수출 증가를 위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을 주도했다. 미국이 빠져나간 공백을 일본이 메우며 TPP의 중심이 됐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일본의 저성장 추세는 바뀐 것이 없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급등락 이후 분기별 GDP 성장률은 0% 주위를 오가고 있다. 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은 255%로 선진국 중 단연 1위다.

비정규직 급증으로 양극화가 심화됐다. 저출산·고령화와 맞물려 국내 수요가 위축됐다. 국내에서 수익성 높은 투자처를 찾지 못한 기업은 해외 투자로 눈을 돌렸다. 저금리와 풍부한 유동성은 오히려 금리가 낮은 엔화를 빌려 금리가 높은 국가 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Yen carry trade)'를 활성화시켰다. 금리가 싼 엔을 빌려 해외에 투자하는 것이다.

혁신을 통한 성장 전략은 성공했는가? 국내에 수요가 없는데 혁신의 유인이 클 리가 없다. 오히려 1990년대 미국의 세계화 전략에 편승하지 못하고, 옛 방식에 매달리다가 반도체·가전 등 전자산업이 몰락하고 말았다. 법인세 인하와 저금리·양적완화를 통한 엔화 절하는 수출 대기업의 실적을 호전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해외 투자에 진력하거나 아니면 내부유보를 통해 현금을 확보했다. 돈이 가계로 환류되지 못하고 국민들은 가난해졌다. 코로나19 이후 시작된 인플레이션을 임금 상승률이 따라잡지 못해 가계의 구매력은 더 낮아졌다.

지난해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3.1%로 일본은행이 정한 기준선 2.0%를 넘어섰다. 일본은행은 마침내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났다고 선언하며 통화정책의 기조를 바꿨다. 그러나 이는 코로나19로 인한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에 기인한 것이며 일본의 정책이 성공을 거둔 결과가 아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극단적으로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시행한 결과, 금융시장의 기능은 마비됐고 은행들은 국채를 일본은행에 내다 파는 것으로 수익을 유지하고 있다. 정부가 시장을 대신하고 있고 금융기관의 중개기능은 약화됐다.

일본은 이러한 상황을 언제까지나 유지할 수 없다. 언젠가 일본 국채의 신뢰도가 떨어지고 시장에서 소화되지 않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금리가 폭등할 것이다.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고, 금융기관이 그것을 사서 일본은행에 팔고, 일본은행이 돈을 찍어 사는 현재의 순환고리도 끊어지게 된다.

일본은 지금이 명분 좋게 탈출할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갈 길이 멀다. 우선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올해 금리 인하를 예고했다. 미국과 일본 간 금리 격차가 줄어들면 일본을 빠져나간 돈들이 회귀할 수 있다.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청산되면서 국제 금융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다. 미국과 일본의 긴밀한 공조관계를 생각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급격한 금리 인상은 증시에 타격을 줄 것이며 금융 비용을 높여 기업의 투자 위축과 도산 증가를 가져올 수 있다. 국가부채의 상환부담을 높여 재정을 위축시킬 것이다. 그나마 정부가 쓸 수 있는 사업예산을 더욱 줄일 것이며 경기 대응능력을 약화시킬 것이다. 일본은 지금 반환점을 돌았지만 도착점은 아득히 멀리 있다. 거북이 걸음처럼 느리면서도 도처에 난관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금리를 낮추고, 돈을 풀고, 부채를 일으키는 정책은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마약 같은 것이다. 내수를 살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기업이 혁신하고 투자하는 선순환 과정이 마련되지 않으면 기업은 밖으로 나가고 국민은 가난하게 되는 일본의 사례가 우리의 현실이 될 것이다.

정인호 객원기자 프로필

▲캘리포니아 주립대 데이비스 캠퍼스 경제학 박사 ▲KT경제경영연구소 IT 정책연구 담당(상무보) ▲KT그룹 컨설팅지원실 이사 ▲건국대 경제학과 겸임교수 등을 지낸 경제 및 IT 정책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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